골드비아그라와 함께하는 습관 개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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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린운 0 Comments 1 Views 25-11-19 03:28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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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비아그라와 함께하는 습관 개선의 힘
약보다 중요한 습관의 변화
많은 남성들이 중년 이후 성기능 저하를 느끼며, 당황스럽고 침묵 속에서 고민을 이어갑니다. 흔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약입니다. 효과가 빠르고, 직접적인 변화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단순히 약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남성의 성기능 문제는 복합적이며, 그 핵심에는 생활 습관과 건강 상태의 불균형이 있다. 결국, 지속적인 개선을 위해선 약물만이 아닌 습관의 변화와 체질 개선이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접근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제품이 바로 골드비아그라입니다.
왜 단순한 약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남성 성기능 저하는 단일 원인으로 발생하지 않습니다.그 배경에는 수면 부족, 운동 부족, 과도한 음주, 스트레스, 호르몬 저하, 혈관 건강 악화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누적될수록 혈류는 원활하지 않게 되고, 발기 기능은 자연스럽게 저하되며, 성욕이나 성적 반응 역시 줄어들게 됩니다.
이런 복합적 문제를 단순한 약물 하나로 해결하려 한다면, 일시적인 반응은 가능할지 몰라도, 근본적인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핵심은 생활 전반의 습관을 바꾸는 것이고, 여기에 과학적으로 설계된 보조제가 함께 작용할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골드비아그라단순한 약이 아닌, 변화의 동반자
골드비아그라는 일반적인 발기부전 치료제처럼 단일 성분에 의존하지 않습니다.대신, 남성의 전반적인 신체 활력을 높이고, 성 기능을 장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천연 생약 성분과 기능성 물질을 복합적으로 구성했습니다. 이는 단기적인 효과를 제공하는 동시에, 일상의 체력 회복과 호르몬 활성화, 혈류 개선까지 고려한 결과입니다.
홍삼 추출물 피로 회복과 면역력 증진, 성기능 강화에 도움.
마카 뿌리 남성호르몬 활성과 성욕 증진에 효과적.
산수유와 복분자 신장 강화, 정력 회복을 지원.
옥타코사놀 에너지 대사 촉진, 지구력 향상에 도움.
구기자, 오미자, 대추 혈류 개선, 정신적 안정감 유도.
이러한 성분들은 각각의 효능을 넘어, 상호보완적 작용을 통해 전체적인 남성 기능 개선에 기여합니다.
습관 개선이 함께할 때 달라지는 결과
골드비아그라를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분명한 효과를 느낄 수 있습니다.그러나 복용과 함께 몇 가지 생활 습관을 병행한다면 그 결과는 훨씬 더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다음은 전문가들이 권장하는 습관입니다.
규칙적인 운동
특히 하체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은 성기 혈류량을 직접적으로 높여줍니다.
유산소 운동은 심혈관 기능을 강화하여 발기력 개선에 효과적입니다.
적절한 수면 관리
수면 중 남성호르몬 분비가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6시간 이상 깊은 수면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속적인 스트레스 관리
만성 스트레스는 성욕과 발기력을 동시에 저하시킵니다.
명상, 산책, 취미 활동 등으로 정서적 안정 확보가 필요합니다.
건강한 식습관
혈관 건강에 좋은 음식 등푸른 생선, 견과류, 채소 등은 발기력 유지에 도움을 줍니다.
고지방고당분 음식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코올 및 니코틴 절제
과도한 음주는 성기능을 일시적으로 억제하며, 흡연은 혈관 수축을 유발합니다.
가능하면 금연하고, 음주는 절제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처럼 습관의 변화는 단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골드비아그라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핵심 요인이 됩니다.
복용법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로
골드비아그라는 하루 한 번, 공복 또는 식후에 복용하는 방식으로 사용됩니다.성관계 전 30분~1시간 전에 복용할 경우 빠른 반응을 유도하며, 정기적으로 복용하면 전반적인 성기능과 활력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부작용 부담이 낮고, 자극적인 약물이 아니기 때문에 장기 복용에도 안정성이 높은 것이 특징입니다.
실제 사용자가 경험한 변화
골드비아그라를 복용한 남성 사용자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후기가 자주 나타납니다.
예전처럼 아내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몸이 가볍고 활력이 도는 느낌이 듭니다.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어 좋습니다.
전에는 관계가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오히려 기다려집니다.
수면 질도 좋아지고, 기분도 안정됐습니다. 전반적으로 건강해진 느낌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단순히 신체적인 변화뿐 아니라, 심리적 안정감과 정서적 회복까지 이어진 결과입니다. 남성의 성기능은 단지 한 가지 능력이 아니라, 전신 건강과 자존감, 관계의 질까지 연결된 중요한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결론골드비아그라와 함께, 삶의 질을 바꾸십시오
남성의 건강은 단순한 발기력이나 성욕의 문제를 넘어서, 자신감과 삶의 질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성기능 저하는 나이만의 문제가 아니며, 오늘의 습관이 내일의 결과를 결정합니다.
골드비아그라는 그 변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동반자입니다.단기적인 만족뿐 아니라, 체력과 호르몬 균형, 정신적 안정까지 아우르는 전방위 솔루션입니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복용뿐 아니라 생활 습관 개선이라는 핵심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변화의 시작점입니다.당신의 건강, 당신의 자신감, 그리고 당신의 부부관계까지.골드비아그라와 함께 다시 세워보십시오.약보다 강한 습관, 그 위에 골드비아그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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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no1reelsite.com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김한수 기자
개신교 선교 140주년을 맞아 지난 4월부터 연재한 ‘한국의 100년 교회를 가다’ 시리즈를 지난주 15회를 마지막으로 마쳤습니다. 마지막 회는 개신교계 원로인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와 류영모 한소망교회 원로목사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서 대담하는 형식으로 꾸몄습니다. 양화진 묘원에 대해서는 조선닷컴의 ‘조선멤버십’에서도 ‘김한수 @쉼’이란 코너에서도 다뤘습니다. 그렇지만 양화진 묘원은 너무나도 감동적인 스토리를 무궁무진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앞선 릴게임손오공 기사에서 소개하지 못한 이야기를 조금 더 말씀드릴까 합니다.
양화진 묘원에는 145명의 선교사와 가족이 잠들어 있습니다. 선교사가 아닌 분들까지 합친 전체 규모는 15국 417명이고요. 모두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외국인들이지요. 특히 선교사와 가족들의 무덤을 보고 있으면 ‘거룩함’ ‘경건함’이란 단어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바다이야기룰 류영모 목사님은 양화진을 생각하면 ‘울컥’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도대체 이분들은 귀국할 생각은 없었던 것일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영훈 목사님은 “사실상 원 웨이 티켓(one-way ticket)으로 온 셈”이라고 했습니다. 부와 명예, 안온한 삶이 보장된 고국을 떠나 열악한 한국에 오면서 이 땅에 복음 야마토게임하기 을 전하고 교육과 의료를 전하고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왔다는 것이죠.
그들의 묘비명엔 헌신과 봉사, 희생의 각오가 새겨져 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 묘지. 앞줄 오른쪽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의 묘, 왼 바다이야기pc버전다운 쪽은 원한경의 부인 에델 언더우드의 묘. /김한수 기자
언더우드 선교사 4대 7명의 가족 묘지를 먼저 보겠습니다. 새문안교회와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의 묘는 원래 고향인 미국 뉴저지 그로브개혁교회 묘지에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의 무덤은 양화진에 있었고요. 1999년 그의 탄신 140주년을 사아다쿨 맞아 그의 묘는 양화진으로 이장돼 가족들 곁에 함께 잠들게 됐습니다. 현재 뉴저지 묘지에는 이장(移葬)한 사실을 안내하는 표석이 설치돼 있고요.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인 2대 원한경의 아내 에델 언더우드(1888~1949)는 6·25전쟁 발발 1년 전 공산주의자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지요. 묘비를 보면 당시 한국인들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고, 그의 죽음에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생생하게 적혀 있습니다.
“부인은 활발하고 어귀차고(뜻이 굳고 하는 일이 빈틈없이 여물다) 다정하고 의로웠었다. 네 아들 외 딸, 며느리,리, 손자 손녀들을 두고 부인은 우리를 위해 끝으로 생명까지 버리었다.” “그의 영은 주의 품에 있으리라. 또 그 몸은 생전 마음과 같이 이 강산과 한 덩어리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아펜젤러 추모비(오른쪽)와 아들 헨리 부부의 묘. /김한수 기자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항에 상륙한 아펜젤러는 감리교 선교사로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했지요. 1902년 목포에서 열린 성경 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침몰 사고로 순직한 아펜젤러는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양화진에는 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하신 첫 기도) 비문 내용 중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라는 구절이 마음에 남습니다. 과연 그들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자유와 빛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앨리스 아펜젤러의 묘.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였던 그녀는 이화학당 교장을 지냈다. /김한수 기자
아펜젤러 추모비 왼편에는 아들 헨리 D 아펜젤러(1889~1953) 부부 묘가 있습니다. 제물포에 상륙할 당시 아펜젤러의 부인 엘라 닷지 여사의 뱃속에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입니다. 헨리의 누나이지요. 1885년 11월 9일 서울에서 태어난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였습니다. 이화학당 교장을 역임하면서 1925년 이화학당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킨 분이죠. 1950년 별세한 그녀는 아버지, 남동생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성경을 펼쳐놓은 모양의 묘비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라는 글귀가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유일한 일본인 안장자인 '고아들의 아버지' 소다 가이치의 묘. 왼쪽은 일본, 오른쪽은 한국 단체가 세운 비석. /김한수 기자
이 묘원의 유일한 일본인 안장자 소다 가이치(曾田 嘉伊智·1867~1962) 묘도 눈길을 끕니다. 그의 묘엔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세운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던 소다는 1899년 대만 거리를 방황하다 술에 취해 쓰러져 죽기 직전이었답니다. 그때 지나가던 한국인 한 명이 그를 거두어 여관에 데려가고 치료해 주고 밥값도 치러주었답니다. 6년 후 한국에 온 그는 은인의 나라에서 은혜에 보답하기로 결심했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기독교 신자가 된 그는 YMCA의 일본어 교사를 거쳐 전도사로 활동하다 1921년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장에 취임해 고아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습니다. 가마쿠라 보육원은 해방 후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에 의해 영락보린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본 패망 후에도 원산에 머물던 그는 1947년 일본으로 귀국했는데 당시 일본 신문은 “반생 동안 한국 고아의 아버지, 한국 영주권을 가진 소다 옹, 조국 전도를 위해 귀국”이라고 보도했다고 합니다.(전택부 ‘양화진 선교사 열전’)
1961년 한경직 목사 등의 초청으로 한국을 다시 찾은 그는 이듬해 3월 별세했는데 당시 우리 정부는 일본인에게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영락보린원과 YMCA를 비롯한 19개 단체가 공동으로 장례를 치른 후 양화진에 안장하면서 묘비를 세웠지요. 당시 주요한 선생이 글을 짓고 서예가 김기승이 글씨를 쓴 묘비에는 ‘고아의 자부(慈父)’라는 제목으로 그의 일생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적었습니다.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라고 적혀 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헐버트의 묘. /김한수 기자
묘원 초입의 헐버트 묘비도 잘 알려져 있지요. YMCA(황성기독청년회) 창립 주역으로 교육과 선교에 힘쓰는 한편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린 분이죠. 일제에 의해 추방된 후에도 미국에서 조선 독립을 외쳤고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고 평소 말했던 그의 꿈은 결과적으로 이뤄졌습니다. 1949년 광복절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86세 노구를 이끌고 한국을 찾은 그는 8월 5일 한국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양화진에 안장됐고, 비석에 영문으로 이름과 생몰 연도, 한글로 생몰 연대를 새겼지만 정작 묘의 주인 이름 자리는 오랜 시간 비어 있었습니다. 그 빈자리가 채워진 것은 50년이 지난 1999년이었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라고 일곱 자를 써서 새겨 넣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됐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언론인 베델(한국명 배설)의 묘비. 앞면(왼쪽 사진)은 검은색인데 뒷면은 일제가 비문을 쪼아내는 바람에 회색으로 보인다. /김한수 기자
역시 묘원 입구의 베델(한국명 배설) 묘비는 앞뒤 색깔이 다릅니다. 뒤에서 보면 마치 검은색과 회색 두 가지 돌을 이어 붙인 것처럼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돌은 하나입니다. 이유는 그의 생전 활동에 불만을 가진 일제 관헌이 비문을 깎아냈기 때문입니다. 영국 출신 언론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한국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는 1909년 37세의 나이로 별세했고 위암 장지연 선생이 추모 글을 써서 비석에 새겼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비문의 본문을 쪼아서 읽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답니다. 현재 비석에선 회색 부분입니다. 1964년 대한민국 전(全)언론인 단체 명의로 장지연 선생의 비문 원문을 서예가 김응현의 글씨로 다시 써서 원래 비석 옆에 새로 세우고 뒷면엔 한글로 풀어 그 사연을 적었습니다.
그 밖에도 원산대부흥 운동을 이끈 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하디의 기념비, 백정들과 일반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함으로써 평등 사상을 전파한 무어 선교사, 이화여대를 설립한 스크랜턴 대(大)부인, 배화여대를 설립한 캠벨 선교사, ‘크리스마스 씰’을 국내에 도입하며 결핵 퇴치에 앞장선 셔우드 홀과 그의 부모인 윌리엄 홀과 로제타 홀 등 한 명 한 명이 우리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분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묘원 이야기를 하다 보니 분위기가 다소 엄숙하게 흐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양화진 묘원은 엄숙하고 비장하지만은 않습니다. ‘묘지’라는 느낌보다는 잘 정비된 공원의 느낌이 더 많습니다. 출신 국가별로 매장 형태가 달라 십자가 모양도 다양합니다. 마치 외국 어느 도시의 묘지에 와 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위치도 지하철 합정역 바로 인근이고 젊은이들의 거리로 유명한 ‘홍대 앞’이 지척입니다. 합정동 근처를 지날 일이 있다면 한번 들러볼 만합니다. 다만 시간 여유를 가지고 방문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묘의 주인과 비문을 살피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개신교 선교 140주년을 맞아 지난 4월부터 연재한 ‘한국의 100년 교회를 가다’ 시리즈를 지난주 15회를 마지막으로 마쳤습니다. 마지막 회는 개신교계 원로인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와 류영모 한소망교회 원로목사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서 대담하는 형식으로 꾸몄습니다. 양화진 묘원에 대해서는 조선닷컴의 ‘조선멤버십’에서도 ‘김한수 @쉼’이란 코너에서도 다뤘습니다. 그렇지만 양화진 묘원은 너무나도 감동적인 스토리를 무궁무진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앞선 릴게임손오공 기사에서 소개하지 못한 이야기를 조금 더 말씀드릴까 합니다.
양화진 묘원에는 145명의 선교사와 가족이 잠들어 있습니다. 선교사가 아닌 분들까지 합친 전체 규모는 15국 417명이고요. 모두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외국인들이지요. 특히 선교사와 가족들의 무덤을 보고 있으면 ‘거룩함’ ‘경건함’이란 단어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바다이야기룰 류영모 목사님은 양화진을 생각하면 ‘울컥’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도대체 이분들은 귀국할 생각은 없었던 것일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영훈 목사님은 “사실상 원 웨이 티켓(one-way ticket)으로 온 셈”이라고 했습니다. 부와 명예, 안온한 삶이 보장된 고국을 떠나 열악한 한국에 오면서 이 땅에 복음 야마토게임하기 을 전하고 교육과 의료를 전하고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왔다는 것이죠.
그들의 묘비명엔 헌신과 봉사, 희생의 각오가 새겨져 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 묘지. 앞줄 오른쪽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의 묘, 왼 바다이야기pc버전다운 쪽은 원한경의 부인 에델 언더우드의 묘. /김한수 기자
언더우드 선교사 4대 7명의 가족 묘지를 먼저 보겠습니다. 새문안교회와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의 묘는 원래 고향인 미국 뉴저지 그로브개혁교회 묘지에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의 무덤은 양화진에 있었고요. 1999년 그의 탄신 140주년을 사아다쿨 맞아 그의 묘는 양화진으로 이장돼 가족들 곁에 함께 잠들게 됐습니다. 현재 뉴저지 묘지에는 이장(移葬)한 사실을 안내하는 표석이 설치돼 있고요.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인 2대 원한경의 아내 에델 언더우드(1888~1949)는 6·25전쟁 발발 1년 전 공산주의자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지요. 묘비를 보면 당시 한국인들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고, 그의 죽음에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생생하게 적혀 있습니다.
“부인은 활발하고 어귀차고(뜻이 굳고 하는 일이 빈틈없이 여물다) 다정하고 의로웠었다. 네 아들 외 딸, 며느리,리, 손자 손녀들을 두고 부인은 우리를 위해 끝으로 생명까지 버리었다.” “그의 영은 주의 품에 있으리라. 또 그 몸은 생전 마음과 같이 이 강산과 한 덩어리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아펜젤러 추모비(오른쪽)와 아들 헨리 부부의 묘. /김한수 기자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항에 상륙한 아펜젤러는 감리교 선교사로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했지요. 1902년 목포에서 열린 성경 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침몰 사고로 순직한 아펜젤러는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양화진에는 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하신 첫 기도) 비문 내용 중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라는 구절이 마음에 남습니다. 과연 그들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자유와 빛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앨리스 아펜젤러의 묘.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였던 그녀는 이화학당 교장을 지냈다. /김한수 기자
아펜젤러 추모비 왼편에는 아들 헨리 D 아펜젤러(1889~1953) 부부 묘가 있습니다. 제물포에 상륙할 당시 아펜젤러의 부인 엘라 닷지 여사의 뱃속에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입니다. 헨리의 누나이지요. 1885년 11월 9일 서울에서 태어난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였습니다. 이화학당 교장을 역임하면서 1925년 이화학당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시킨 분이죠. 1950년 별세한 그녀는 아버지, 남동생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성경을 펼쳐놓은 모양의 묘비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라는 글귀가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유일한 일본인 안장자인 '고아들의 아버지' 소다 가이치의 묘. 왼쪽은 일본, 오른쪽은 한국 단체가 세운 비석. /김한수 기자
이 묘원의 유일한 일본인 안장자 소다 가이치(曾田 嘉伊智·1867~1962) 묘도 눈길을 끕니다. 그의 묘엔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세운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던 소다는 1899년 대만 거리를 방황하다 술에 취해 쓰러져 죽기 직전이었답니다. 그때 지나가던 한국인 한 명이 그를 거두어 여관에 데려가고 치료해 주고 밥값도 치러주었답니다. 6년 후 한국에 온 그는 은인의 나라에서 은혜에 보답하기로 결심했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기독교 신자가 된 그는 YMCA의 일본어 교사를 거쳐 전도사로 활동하다 1921년 가마쿠라 보육원 경성지부장에 취임해 고아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습니다. 가마쿠라 보육원은 해방 후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에 의해 영락보린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본 패망 후에도 원산에 머물던 그는 1947년 일본으로 귀국했는데 당시 일본 신문은 “반생 동안 한국 고아의 아버지, 한국 영주권을 가진 소다 옹, 조국 전도를 위해 귀국”이라고 보도했다고 합니다.(전택부 ‘양화진 선교사 열전’)
1961년 한경직 목사 등의 초청으로 한국을 다시 찾은 그는 이듬해 3월 별세했는데 당시 우리 정부는 일본인에게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영락보린원과 YMCA를 비롯한 19개 단체가 공동으로 장례를 치른 후 양화진에 안장하면서 묘비를 세웠지요. 당시 주요한 선생이 글을 짓고 서예가 김기승이 글씨를 쓴 묘비에는 ‘고아의 자부(慈父)’라는 제목으로 그의 일생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적었습니다.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라고 적혀 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헐버트의 묘. /김한수 기자
묘원 초입의 헐버트 묘비도 잘 알려져 있지요. YMCA(황성기독청년회) 창립 주역으로 교육과 선교에 힘쓰는 한편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린 분이죠. 일제에 의해 추방된 후에도 미국에서 조선 독립을 외쳤고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고 평소 말했던 그의 꿈은 결과적으로 이뤄졌습니다. 1949년 광복절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86세 노구를 이끌고 한국을 찾은 그는 8월 5일 한국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지요. 양화진에 안장됐고, 비석에 영문으로 이름과 생몰 연도, 한글로 생몰 연대를 새겼지만 정작 묘의 주인 이름 자리는 오랜 시간 비어 있었습니다. 그 빈자리가 채워진 것은 50년이 지난 1999년이었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라고 일곱 자를 써서 새겨 넣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됐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언론인 베델(한국명 배설)의 묘비. 앞면(왼쪽 사진)은 검은색인데 뒷면은 일제가 비문을 쪼아내는 바람에 회색으로 보인다. /김한수 기자
역시 묘원 입구의 베델(한국명 배설) 묘비는 앞뒤 색깔이 다릅니다. 뒤에서 보면 마치 검은색과 회색 두 가지 돌을 이어 붙인 것처럼 보입니다. 자세히 보면 돌은 하나입니다. 이유는 그의 생전 활동에 불만을 가진 일제 관헌이 비문을 깎아냈기 때문입니다. 영국 출신 언론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한국인들의 항일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는 1909년 37세의 나이로 별세했고 위암 장지연 선생이 추모 글을 써서 비석에 새겼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비문의 본문을 쪼아서 읽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답니다. 현재 비석에선 회색 부분입니다. 1964년 대한민국 전(全)언론인 단체 명의로 장지연 선생의 비문 원문을 서예가 김응현의 글씨로 다시 써서 원래 비석 옆에 새로 세우고 뒷면엔 한글로 풀어 그 사연을 적었습니다.
그 밖에도 원산대부흥 운동을 이끈 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하디의 기념비, 백정들과 일반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함으로써 평등 사상을 전파한 무어 선교사, 이화여대를 설립한 스크랜턴 대(大)부인, 배화여대를 설립한 캠벨 선교사, ‘크리스마스 씰’을 국내에 도입하며 결핵 퇴치에 앞장선 셔우드 홀과 그의 부모인 윌리엄 홀과 로제타 홀 등 한 명 한 명이 우리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분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묘원 이야기를 하다 보니 분위기가 다소 엄숙하게 흐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양화진 묘원은 엄숙하고 비장하지만은 않습니다. ‘묘지’라는 느낌보다는 잘 정비된 공원의 느낌이 더 많습니다. 출신 국가별로 매장 형태가 달라 십자가 모양도 다양합니다. 마치 외국 어느 도시의 묘지에 와 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위치도 지하철 합정역 바로 인근이고 젊은이들의 거리로 유명한 ‘홍대 앞’이 지척입니다. 합정동 근처를 지날 일이 있다면 한번 들러볼 만합니다. 다만 시간 여유를 가지고 방문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묘의 주인과 비문을 살피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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